여성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생성 김 재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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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15750/chss.56.201505.008
【논문】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33)
김 재 인
【주제분류】여성철학, 정치철학
【주요어】여성주의, 여성-생성, n개의 성, 생성의 정치학, 욕망
【요약문】‘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와 ‘여성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각각 ‘생성의 정치학’과 ‘여성-생성’의 문제로 변환될 수 있다. 들뢰즈에게 생
성이란 두 그램분자적 항에서 분자적 요소들을 추출해서 하나의 블록을 이룸
으로써 성립한다. “동물-생성”은 생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입구의 역할을 하지
만, 결국은 “생성 일반”을 이해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는 “여성”과 “남
성”이라는 통계적 · 그램분자적 항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 “성의 의인적 재현”
을 가로질러 “비-인간적 성”에, “n개의 성”에 도달해야만 한다. 따라서 “여성”
역시도 고정된 집합이나 상태가 아니라 생성이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배적 표준으로서의 “다수성”을 대표하는 “인간/남성”에 맞서서만 “동물”과
“여성”은 “소수자”이다. “여성조차도 여성-생성을 해야만 한다.” 이는 “분자적
정치학”을 가동시켜 분자적 요소들에 이르는데, 이는 “무의식”으로서의 우주
와 그 내재적 원리로서의 “성욕”과 “욕망”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욕망한
다는 것은 바람직한 배치체를 구성하는 일이며, 이로써 기존 사회 질서는 요동
치고 변화한다. “생성의 정치학”은 곧 “비인간적 욕망의 정치학”인 것이다.
* 이 논문은 2014년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216 논문
Ⅰ. 들어가는 말
남성이 여성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서구에서 인간(l’homme)
은 대체로 남성(l’homme)의 다른 표현에 불과했을진대, 서구의 언어로 남
성이 여성을 말하려 한다는 것은 무슨 시도일까? 남성은 과연 여성주의를
논할 자격이 있을까? 남성이 말하는 여성이 과연 진짜 여성일까? 오히려 남
성이 상상한 여성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다른 한편, 여성이 여성을 말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생물학적 여성이
면 여성을 말할 권리가 자연스레 주어지는 걸까? 여성이 여성을 말하는 것과
남성이 여성을 말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성이 남성을 말한다는 것
과 남성이 여성을 말하는 것은 대등한 일일까? 남성이 여성을 상상하기만 할
뿐이라는 말이 성립한다면, 여성 또한 남성을 상상하기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논의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상황은 녹녹치 않다.
여성주의 내에서도, 또는 여성주의가 발전해 온 역사 속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여성주의 첫 세대에서는 여성도 남성
과 동등하게 인간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 다음 세대에서는 여성만의 고유
성이 있기 때문에 그 고유성에 천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하여
긴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여성성을 강조하여 여성적 주체를 확립하자니
본질주의적 고집스러움 때문에 주저되고, 탈젠더적으로 성차이를 제거하
자니 여성주의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주저된다.”1)
이 주저는 앞서 열거한 여러 의문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여성성의
강조는 본질주의 또는 생물학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고, 성차의 제거는 여성
주의 자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여성주의 또는 더 정확하게는 여성에 대해 여러 언급을 했으
며, 한국의 여성주의 내에서도 이 점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곤 했다.2) 그
1) 신지영(2007), 「들뢰즈의 차이 개념에 관련한 여성주의 재정립 가능성」, 한국여성철
학 제7권, pp.120-1.
2) 신지영(2007) 외에도 연효숙(2006),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와 욕망론 그리고
여성적 주체」, 한국여성철학 제6권; 김은주(2013), 「여성주의와 긍정의 윤리학-들
뢰즈의 행동학(éthologie)을 기반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홍지영(2013),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17
런데 내가 보기에 들뢰즈의 여성 철학은 생성 철학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도적 단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생성 철학은 ‘생성의 정치학’에
서 그 중요한 귀결의 하나를 찾는다. 나는 본 논문에서 지난 논의들을 다시 검
토하는 대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논점에서 출발해서 더 멀리 가보려 한다.
서두에 언급한 여러 물음들이 일거에 해소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만, 앞서 신지영(2007)이 요약한 ‘현재의 여성주의가 갖는 긴장’을 해소하
는 일은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신지영은 이 일에 있어 들뢰즈가 어떻
게 유효한지를 논하면서 중요한 물음 두 개를 다루고 있다. 첫째는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p.131)이고 둘째는 “여성은 누구인가?”(p.132)이
다. 신지영은 “도처에 존재하는 미시 파시즘”과 싸워야 하며, 여성은 “특이
성으로서의 남성(un homme)”과 소통할 수 있는 “비어 있는 이름으로서의
여성(une femme)”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가 여전히 유
효한 층위와, 여성주의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층위는 동시에 존재한
다”는 것이다(p.131-2).
나는 들뢰즈와 여성주의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글 중에서 바로 이 접근
방향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들뢰즈의 ‘차이’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
를 풀어가려 했기 때문에, 세부에서는 매끄럽지 않은 대목이 간혹 눈에 띄
지만, 위의 두 물음을 묻고 각각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더 심화된 논의를 위한 소중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나는 들뢰즈의
‘생성’ 개념을 매개로 해서 신지영의 두 물음을 만나게 하려 한다. 그리하여
첫째 물음은 ‘생성의 정치학’의 문제로, 둘째 물음은 ‘여성-생성’의 문제로
전환된다. 이로써 문제는 여성주의의 지평을 떠나 (들뢰즈와 과타리의) 생
성의 지평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물론 이 이동은 여성주의의 지평 확장이라
는 점에서, 여성주의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어린 들뢰즈의 모습 하나를 보자. 갓 스물이
된 들뢰즈는 「여성에 대한 기술(記述): 성화(性化)된 타자의 철학을 위해」
「들뢰즈의 ‘되기’ 개념을 통해 재고하는 섹슈얼리티의 문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
위논문; 김은주(2013), 「들뢰즈의 신체 개념과 브라이도티의 여성 주체」, 한국여성
철학 제20권; 김은주(2014), 「들뢰즈와 가타리의 되기 개념과 여성주의적 의미: 새로
운 신체 생산과 여성주의 정치」, 한국여성철학 제21권 등을 들 수 있다.
218 논문
(1945)3)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은 그가 처음 공간(公刊)한 글이다. 이
글을 거론하는 것은 솔직히 학문적으로는 반칙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들
뢰즈는 1952년까지 쓴 글들을 자신의 작품으로 공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최초의 작품을 내용까지 진지하게 고찰하지는 않더
라, 적어도 들뢰즈의 최초의 관심 중 하나가 무엇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서로 활용할 수는 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성은 아직 철학적
지위를 지니고 있지 않다. 절박한 문제다.” 여기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들뢰즈의 첫 철학적 관심은 여성에 있었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하이
데거가 “인간 현실(human reality)”을 탈성화(asexualize)했다는 점을 비판
하는 사르트르를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충분히 진
전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어 들뢰즈는 “남성 타자(the male-Other)”
와의 차이를 중심으로 여성의 “본질들”을 몇 가지 측면에서 기술하려 시도
한다. 이 와중에 들뢰즈가 절친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의 미간행 텍스
트에서 빌린 “가능 세계의 표현(the expression of a possible world)”이라
는 문구로 “타자” 개념을 정의한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이 글이 훗
날 개진할 타자론4)의 일부를 선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렇기에 이
글이 들뢰즈 자신에 의해 부인된 까닭을 더욱 궁금케 한다. 필경 모종의 미
숙함이 이 글이 부인된 이유이리라. 그렇다면 어떤 미숙함일까? 하나는 들
뢰즈가 시도한 기술(記述)이 현상학적 기술이라는 점이다(“현상학은 사랑받
는 이의 현상학이어야만 한다”(p.17)). 들뢰즈는 여전히 사르트르의 연장선
상에서 작업을 해보려 했던 것이다.5) 나아가 들뢰즈는 여성에 대한 여러 기
3) Gilles Deleuze (1945), “Description de la femme: Pour une philosophie d’Autrui
sexuée” in Poésie 45, no. 28, pp.28-39. “Description of Woman. for a philosophy of
the sexed other”, tr. Keith W. Faulkner, in ANGELAKI. journal of the theoretical
humanities, vol. 7. no. 3. December, Routledge, 2002, pp.17-24. 인용은 영어 텍스트
에서.
4) Gilles Deleuze (1967), “Une Théorie d’autrui (Autrui, Robinson et le pervers)”, in
Critique 241, pp.503-25. 이 글은 개정되어 Gilles Deleuze (1969), Logique du sens,
Minuit의 부록으로 수록된다.
5) 사르트르에 대한 들뢰즈의 열정과 실망에 대해서는, François Dosse (2007),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Biographie croisée, La Découverte, pp.118-20 참조.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19
술을 마친 후, 마지막 문단에서 “애무”를 넘어선 사랑은 “불순 또는 오염”
(impurity)으로서 이는 “본질들의 기술의 영역(the domain of a description
of essences)”을 떠나 있는 “도덕적 기술(a moral description)”에 속한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p.24). 그러나 “본질”과 “도덕”의 구분은 얼마 후 흄에 대
한 논문을 쓰게 될 들뢰즈로서는 자신이 아무런 중요한 작업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인이다. 왜냐하면 흄의 의미에서 “도덕”은 철학의 처
음과 끝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의 이론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6) 따라서 자신의 첫 글에 대한 들
뢰즈의 부인은 여성을 철학적으로 논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가 아니면 안 된
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문은 생성의 의미를 번역의 문제와 함께 고찰하고(II절), 여성-생성이
생성 일반에 대해 갖는 위상을 살핀 뒤(III절), 생성의 문제가 곧 정치의 문
제임을 밝히는(IV절) 순서로 전개될 것이다.
Ⅱ. 생성의 의미
들뢰즈는 ‘여성’, ‘성(sexe)’, ‘성욕(sexualité)’의 문제를 ‘생산’과 ‘생성’
의 문제로 다룬다. 이 점은 니체와 철학(1962)7) 및 「아리아드네의 신비」
(1963년 3월)8)와 같은 이른 시기의 문헌에서부터 확인된다. 한편 1963년
10월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통일성」9)을 발표하는데, 이 글은
6) Gilles Deleuze (1953), Empi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UF, p.152.
7) Gilles Deleuze (1962),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UF.
8) Gilles Deleuze (1963), “Mystère d’Ariane”, in Philosophie no. 17, Minuit, 1987,
pp.66-72. 원래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l’étude nietzschéennes, 1963년
3월, pp.12-15에 수록된 글을 수정 없이 게재. 나중에 Gilles Deleuze (1993), Critique
et clinique, Miniut, pp.126-34에 수정 증보된 형태로 “Mystère d’Ariane selon
Nietzsche”라는 제목으로 재수록.
9) Gilles Deleuze (1963), “Unité de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in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vol. 68, pp.427-442.
220 논문
다음 해 출간되는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들(1964)을 발췌해서 수록한
것으로, 프루스트에서의 성의 문제, 이성애뿐 아니라 동성애까지 포함하는,
그리하여 ‘횡단성애(橫斷性愛)’ 또는 ‘n개의 성’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1960년대 초기의 들뢰즈의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가 ‘성’의
문제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 이 텍스트들은 성의 문제를 차이와 생성의
관점에서 다룬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들뢰즈의 존재론은 ‘차이 존재론’이며, 다른 말로 하
면 ‘생성 존재론’이다. 그리고 ‘생성 존재론’은 들뢰즈 고유의 니체 해석에
서 유래했다. ‘즉자적 차이’는 ‘생성’의 번역이며, 차이와 반복(1968)은
니체와 철학의 확장된 주석이다. 들뢰즈 철학의 이 기원 자체를 잊게 되
면, 들뢰즈의 철학 체계는 미궁으로 머문다.
우선 들뢰즈에서 생성의 의미를 보자. ‘생성의 의미’는 최소한 이중의 뜻을
지닌다. 그것은 우선 철학사에서 ‘생성’이 문제로서 제기된 맥락을 이해한다
는 뜻이며, 또한 ‘생성’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두 의미는 처음부터 얽혀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아
낙시만드로스는 실존 세계, 곧 생성 세계를 ‘유죄’와 그에 따른 ‘벌’이라고 이
해한다. 여기에 맞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실존과 생성을 ‘결백’으로 이해하며
“생성을 긍정으로 만들었다”.10) 나아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생성은 존재의
긍정(le devenir [est] l’affirmation de l’être)”이며, “회귀는 생성하는 것의 존
재(revenir est l’être de ce qui devient)”이다.11) 여기서 생성의 의미는 둘로
정리된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존재는 생성이며, 오직
생성만이 존재한다(있다). 윤리적으로 보면, 생성은 결백하며, 실존 세계(삶)
는 그 자체로 정당하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 2장을 통해 이 논의를 발전
시키는데, 특히 ‘영원회귀’ 사상과 관련하여 그렇게 한다.
들뢰즈 & 과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1972)에서
부터 “욕망하기는 생성들을 통과한다(désirer, c’est passer par des devenirs)”
고 말했지만, ‘생성’이 특유의 개념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카프카. 소수 문
10)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27.
11) 같은 책 pp.27-28.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21
학을 위해(1975)에서부터이다.12) 사실 카프카에는 온갖 종류의 동물-생
성이 등장한다. 갑충-생성, 쥐-생성, 원숭이-생성 등. 그런데 카프카와 들뢰
즈 & 과타리 모두는 이 생성이, 또는 변신이, 꿈도 환상도 아니고, 상상적인
것도 은유적인 것도 아니며, 현실적(réel)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동물-생성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적일까? 생성에 대한 통상적 오해를 불식
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세 개의 텍스트를 검토해 보자.
1) “생성은 포획이고, 소유고, 가치증식이지, 결코 재생산이나 모방이 아니
다(le devenir est une capture, une posession, une plus-value, jamais une
reproduction ou une imitation).”13)
2) “생성,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흉내 내는 것도, 정의의 모델이건 진실의
모델이건 어떤 모델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출발하는 항도 없고, 도착하거
나 도착해야 하는 항도 없다(il n’y a pas un terme don’t on part, ni un
auquel on arrive ou auquel on doit arriver). ‘너는 무엇으로 생성하는가
(qu’est-ce que tu deviens)?’라는 물음은 특히 어리석다. 왜냐하면 누군가
가 생성하는 한, 그가 생성해 가는 것(ce qu’il devient)은 그 못지않게 변하
니 말이다. 생성들은 모방, 동화 같은 현상들이 아니라, 이중 포획(double
capture), 비평행적 진화(évolution non parallèle), 두 권역(圈域)의 결혼
(noces entre deux règnes) 같은 현상들이다. […] 그것은 차라리 두 권역들
의 만남, 회로 합선, 각각 자신을 탈영토화하는 코드의 포획이다.”14)
3) “동물-생성은 꿈도 환상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어떤 현실성이 문제가 되고 있을까? […] 생성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
도 생산하지 않는다. […] 현실적인 것, 그것은 생성 자체, 생성의 블록이지,
생성하는 자(celui qui devient)가 이행해 갈, 고정된 것으로 상정된 항들이
아니다. 생성은 생성된 동물이라는 항이 없더라도 동물-생성이라고 성격이
부여될 수 있고 또 부여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동물-생성은 인간이 생성해
가는 동물이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현실적이다. 또한 동시에, 동물의 다른
것-생성은 이 다른 것이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현실적이다. […] 생성은 하
나도 둘도 둘의 관계도 아니며 둘-사이(entre-deux), 경계(frontière) 또는
도주선(ligne de fuite)이다.”15)
12)
13)
14)
15)
François Zourabichvili (2003), Le vocabulaire de Deleuze, ellipses, p.29.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1975), 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Minuit, p.25.
Gilles Deleuze & Claire Parnet (1977/1996), Dialogues, Flammarion, pp.8, 55.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1980),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22 논문
이 텍스트들에서 최우선으로 강조되는 것은 devenir 동사의 의미를 일상적
용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통 ‘A devient B’라고 하면 ‘A
가 B로 되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동물이 되다’, ‘남성이 여성이
되다’, ‘어른이 아이가 되다’ 등. 그러나 생성에 ‘항’은 없으며, ‘항들의 관
계’도 없다. 그런 점에서 생성은 “실체적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16)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방금 전에 열거한 문장들에서 ‘인간’, ‘동물’, ‘남
성’, ‘여성’, ‘어른’, ‘아이’와 같은 항이나 실체를 지우는 것이 일차적이다.
사실이지, 그런 항이나 실체를 남겨둔다면, 생성은 여전히 상상이나 은유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진짜로 쥐로 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에, 이 경우 인간의 쥐-생성은 결국 상상이나 은유로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되기”라는 번역어는 꽤나 부적절하다. ‘A가 B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정작 ‘되기’라고 번역하는 순간 우
리 언어는 ‘A가 B로 되기’라는 이해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성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도움이 되는 설명의 하
나는 주라비슈빌리가 제공했다.
“꿈이나 상상적인 것(l’imaginaire)에 호소하기는커녕, 생성들은 현실적인
것(le réel)의 견실함(consistance) 그 자체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생성의 논
리를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모든 생성은 하나의 “블록(bloc)”을 형성
한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생성은 서로 자신을 “탈영토화”하는 두 개의 이
종(異種)적 항들의 만남 또는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이 되기
위해 자신인 바를 포기하지 않는다. 살고 느끼는 또 다른 방식(une autre
façon de vivre et de sentir)이 우리의 [살고 느끼는] 방식에 출몰하거나 둘
러싸고, 우리의 방식을 “빠져나가게 만든다(fait fuir)”. 따라서 관계는 두
항이 아니라 네 항을 동원하며, 서로 엮인 이종적 계열들 안에서 재분배된
다. 즉, y를 감싸는 x는 x′이 되는 한편, x와 이런 관계 안에서 취해진 y는 y′
이 된다.”17)
2, Minuit, pp.290, 360.
16) Stéphan Leclercq & Arnaud Villani (2003), “Devenir”, p.101, in Robert Sasso &
Arnaud Villani (eds.) (2003), Le Vocabulaire de Gilles Deleuze, Les Cahier de
Noesis no. 3, Printemps 2003.
17) Zourabichvili, 같은 책, p.29-30.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23
이 설명을 참조하고, 들뢰즈의 연관 개념들을 활용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생성 도식’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들뢰즈가 생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은 재생산(생식), 모방, 흉내, 모델
따르기, 동화 등이다. 이것들은 x와 y 같은 그램분자적 항을 전제하고 고수
한다. 생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x와 y 같은 그램분자적 항 또는 상태
에서 각각 빠져나와야 한다. 그렇기에 x도 y도 변한다. 그것이 x′과 y′ 같은
것들이다. x와 y는 원래의 영토에서 빠져나와 각각 x′과 y′으로 바뀌었다.
들뢰즈가 이렇게 원래 속해 있던 영토에서 빠져나오는 사태에 사용하는 개
념이 “탈영토화” 또는 “도주”이다. x에 대해 x′이, y에 대해 y′이 여전히 어
떤 관련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그램분자적 항이나 상태’ 대(對) ‘분자적 요
소나 코드’라는 의미에서뿐이다. 그리고 x′과 y′이 하나의 블록을 형성한다.
이 블록은 위상학적 의미에서 “이웃지대(zone de voisinage)”이며, x와 y는
분간 불가능하다. “블록”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또
한 이런 식으로 “x의 y 생성” 및 “y의 x 생성”은 동시에 일어난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은 “x′과 y′의 동시 생성”이며, x와 y의 “사이” 또
는 “경계”에서 ‘x′과 y′으로 이루어진 생성의 블록’이 형성되는 사건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생성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다.” 그런데 생성된 이 블록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생성의 블록은 x의 분자적
224 논문
요소(x′)와 y의 분자적 요소(y′)를 포획하고 소유했다. 이 포획이 “이중 포획”
인 까닭은, 포획이 두 그램분자적 항으로부터 각각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
론 포획은 x도 y도 아닌 제3지대(‘x′과 y′으로 이루어진 생성의 블록’)에서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이 과정에서 “가치증식(plus-value)”18)이 일어난다.
그리고 통상의 재생산(생식)이 동종(同種) 간에 이루어지는 반면, 여기서는
이종(異種) 간의 결혼이 일어난다. “두 권역의 결혼”이란 그런 뜻이다(가령
서양란과 말벌의 결혼). 그리고 “생성의 블록”이 “비평행적 진화”인 까닭은
두 권역이 서로를 가로지르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들뢰즈 & 과타리가
“현실적인 것, 그것은 생성 자체, 생성의 블록”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생성의 논리’에 따라서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모든 생성은 현실적이다.
이 논리를 앞의 도식을 통해 다시 살펴보자. 생성은 x, y, x′, y′이라는 네
개의 항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그 네 항은 xy를 밑변으로 x′y′을 윗변으로
하는, 피라미드 모양을 이룬다. 각각 x, y라는 항에서 x′, y′이라는 분자적
요소가 새어나오며, 반대 방향에서 보면 x′-y′의 블록은 x와 y에서 자신의
분자적 요소를 (이중으로) 포획한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x′-y′의 블록은 서
로 분간 불가능한 지대, 위상학적 이웃지대를 이루며, 따라서 무한히 접근하
는 과정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피라미드의 상단은 차라리 두 선
분 xx′과 yy′이 서로 만나지 않는, 무한히 근접할 뿐인 하나의 극한(limite)과
도 같은, xy를 밑변으로 하는 삼각형의 꼭짓점과 더 유사하다. 생성 그 자체
또는 생성의 블록이 자신을 생산하는 곳은 바로 그곳 x′-y′이다.
Ⅲ. 동물-생성, 여성-생성, n개의 성
천 개의 고원의 제10 고원은 생성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여기에 등장하
는 생성은 꽤 많다. 강렬함-생성, 동물-생성, 지각불가능-생성, 식물-생성, 광
18) plus-value라는 개념은 특히 들뢰즈의 전체 저술을 거쳐 조심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
것은 “잉여가치”라는 전통적인 번역어를 통해 이해해서는 안 되며, 말 그대로 ‘가치
(value, Wert)의 증식(plus, mehr)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25
물-생성, 여성-생성, 아이-생성, 분자-생성, 입자-생성, 음악-생성 등. 그렇다
면 들뢰즈 & 과타리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성이 있다는 것
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이토록 많은 생성이 다뤄져야 하는 걸까? 각 생성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여성-생성의 지위는 어떠할까?
사실 들뢰즈 & 과타리가 ‘생성’을 말하는 데 있어 일차적인 통로로 삼는
것은 “동물-생성”이다. 이 점은 제10편의 편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래는
그 첫 페이지이다.
10.1730 Devenir-intense, devenir-animal,
devenir-imperseptible...
226 논문
천 개의 고원은 각 고원마다 세 개의 요소를 제시하며 시작한다. 첫째는
날짜, 둘째는 제목, 셋째는 그림이다. 그러면 우선 여기서 1730년이라는 날
짜는 무엇을 가리킬까? 들뢰즈 & 과타리에게 날짜란 “인물, 주체, 사물, 또
는 실체의 그것과 아주 다른 개체화 양태”로서 “이것임(heccéité)” 또는
“사건”을 뜻한다.19) 그렇다면 1730년은 어떤 개체화 양태 또는 사건을 가
리키는가? “1730년부터 1735년까지 세상은 온통 흡혈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20) 여기서 흡혈귀는 “인간을 가로지르고 포함하면서, 동물 못지
않게 인간도 변용시키는 아주 특수한 동물-생성들”을 가리킨다. 들뢰즈 &
과타리가 제시한 그림도 바로 이런 동물-생성들을 보여준다. 이런 반인반
수(半人半獸)는 동서고금에 낯설지 않다. 끝으로 제목인 “강령함-생성, 동
물-생성, 지각불가능-생성…”이 있다. 게다가 이 긴 고원에 처음으로 등장
하는 사례가 바로 “쥐 생성”이다.21) 이런 점들을 볼 때, 이 ‘생성’ 고원은 동
물-생성을 첫째 입구로 마련해 놓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제목에서
생성의 목록이 완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 두어야 한다. 제목은 생
성의 목록이 계속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결국은 여러 개별적 생성들이
아닌 생성 일반을 말하려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생성이 어찌 보면 특권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지위를 차지하는 것
은 무슨 까닭일까? 변신의 신 디오니소스를 떠올려 볼 수도 있으리라. 이미
「아리아드네의 신비」에서 “황소-디오니소스(Dionysos-taureau)”22)가 등
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운 데서 찾자면, 카프카(Franz
Kafka)가 있다. 카프카야말로 동물-생성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가령, 그
레고르 잠자의 갑충 생성. 우리는 가끔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23) 아니면, 개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 느낌, 또는 더 정확히는
이 느낌의 형성, 그것이 바로 “정감(affect)”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
19)
20)
21)
22)
23)
Deleuze & Guattari, Mille Plateaux, p.318.
같은 책, p.290.
같은 책, p.285-286.
Gilles Deleuze, Critique et clinique, p.131.
“나는 느낀다(je sens)” 또는 ‘기분(Stimmung)’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1972),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pp.22-29 참조.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27
서 “정감은 생성이다(les affects sont des devenirs)”.24) 이 문장에서 “생
성”은 술어(prédicat)이다. 따라서 거꾸로 ‘생성은 정감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정감과 생성의 동일성이 아니라 단지 정감의 한 특성이
생성이라는 점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동물-생성은 인
간에게 가장 흔한 생성의 경험이며, 그래서 생성에 대해 논의하고 설명하기
시작할 때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누구나 동물-생성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생성 그 자체’이
지 그것과 짝을 이루는, 다시 말해 “~-생성”의 “~” 자리에 오는 동물, 여성,
아이, 분자 등이 아니다. 생성과 짝을 이루는 여러 사례들은 결국 생성이 무
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 유효한 것이다. 물론 아무 것이나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동물-생성이 “인간(l’homme)”의 동물-생성과 관련된다는 점은 다른 생
성의 사례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이다. 인간-동물의 대립에서 출발
하면, 남성-여성, 어른-아이, 그램분자-분자 등의 대립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생성의 정치학”을 다루는 Ⅳ절에서 더 논의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성-생성의 특수함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들뢰즈 & 과
타리의 생성 이론에서 여성-생성은 탁월한(par excellence)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남성과의 대립 속에서 차지하는 특수함 때문에 여성-생성
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입장은 남성 철학자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편견이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까? 과연 여성은 누구이고, 또 무엇일
까?
들뢰즈는 아주 초기부터 성에 대한 통념을 해체한다. 그가 참조하는 것
은 동성애자 프루스트(Marcel Proust)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들
(1964)에서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소돔과 고모라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데, 이 구절은 훗날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이
남자들은] 여자들을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한 명의 다른 여자 역할을 하며,
이와 동시에 이 여자는 이 남자들이 남자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을 이 남자들에게 제공한다.”25) 이 구절을 들뢰즈 & 과타리는 다음과 같
24) Deleuze & Guattari, Mille Plateaux, p.314.
228 논문
이 해석한다. “우리는 통계적 또는 그램분자적으로는 이성애자이지만, 개
인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동성애자이며, 결국 요소적으로, 분자적으로는 횡
단 성애자(trans-sexués)이다.”26) 요컨대 남녀 성의 구분이 관건이 아니라
“통계적” 또는 “그램분자적” 성과 “요소적” 또는 “분자적” 성의 구분이 중
요하다는 것이다. 들뢰즈 & 과타리는 맑스의 “비-인간적 성(sexe nonhumain)”이 바로 후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면서, 맑스는 이를 통해 “성의
의인적 재현(la représentation anthropomorphique du sexe)을 뛰어넘게”
했다고 평가한다.27) 들뢰즈 & 과타리는 이어서 말한다.
“어디에나 현미경적 횡단-성욕이 있어서, 여자 속에 남자만큼 남자들이 들
어 있게 하고 또 남자 속에 여자만큼 여자들이 들어 있게 하되, 남자들이 다
른 사람들과, 또 여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두 성의 통계적 질서를 뒤집는 욕
망적 · 생산적 관계들 속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
만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둘을 하는 것도 아니며, 수천수만을 하는 것
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 기계들 또는 비-인간적 성이다. 즉 하나의 성이 아
니요, 두 개의 성도 아니라, n개의 성이다. 사회가 주체에게 강요하고 주체
자신도 자기 자신의 성욕에 대해 받아들이는 의인적 재현을 넘어, 분열 분
석은 한 주체 안에 있는 n개의 성의 다양한 분석이다. 욕망적 혁명의 분열분석적 공식은 무엇보다 이럴 것이다. 곧, 각자에게 자신의 성들을.”28)
이런 입장은 다시 천 개의 고원으로도 이어지며, “n개의 성”29) 또는 “n
개의 분자적 성”30)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게 사용된다.
25) Gilles Deleuze (1976, 제3판), Proust et les signes, PUF, p.98. Deleuze & Guattari
(1972), L’Anti-Oedipe, p.83.
26) Deleuze & Guattari, L’Anti-Oedipe, p.82.
27) 같은 책, p.350. “비-인간적 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김재인(2013), 「들뢰즈의 비
인간주의 존재론」,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p.80-86과 Jae-Yin Kim (2013),
“Deleuze, Marx and Non-Human Sex: An Immanent Ontology Shared between
Anti-Oedipus and Manuscripts from 1844”, in Theory and Event, Volume 16, Issue
3,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3 September 참조.
28) Deleuze & Guattari, L’Anti-Oedipe, p.352.
29) Deleuze & Guattari, Mille Plateaux, pp.340, 341.
30) 같은 책, p.339.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29
“중요한 것은 사랑 자체가 기이하면서도 거의 가공할 힘들을 지닌 전쟁 기
계라는 점이다. 성욕은 천 개의 성의 생산이며, 천 개의 성은 그 각각이 통제
할 수 없는 생성들이다. 성욕은 남성의 여성-생성과 인간의 동물-생성을 지
나간다. 즉 입자들의 방출이 있는 것이다.”31)
이로써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하나는, 들뢰즈 & 과타리의 입장이 단순한 남
성주의(?)를 충분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관건은 성에 대한 통계적 그램분
자적 이해를 극복해서 요소적 · 분자적 · 입자적 이해로 나아가는 일이다.
“여성 고유의 글쓰기”에 대해 질문을 받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한다.32) 울프의 이 반응은 “명료하게 구별되는 그램분자적 존재물로서의
여성이나 아이와는 전혀 유사하지 않은 여성-생성, 아이-생성이 있다”33)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 모든 생성은 [이미] 분자적이다.”34) 그런 점에서
“집합이나 상태”와 “생성이나 과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35) 따라서 여성
또한 요소적 분자적 여성이어야 하며, 생성이나 과정으로서의 여성, 즉 여
성-생성이어야 한다.
이제 문제는 단순히 여성-생성을 넘어 생성 일반이 지니는 공통된 특성
으로 나아간다. 요컨대 분자-생성이란 무엇일까? 생성은 누구와 싸우려 하
는 걸까?
Ⅳ. 생성의 정치학
실은 아무 생성이나 다 가능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 & 과타리는 심각하
게 묻는다. “남성(/인간, homme)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인
간)-생성은 없는 걸까?”36) 왜 남성은 생성에서 비켜나 있을까? 이 물음에
31)
32)
33)
34)
35)
같은 책, p.341.
같은 책, p.338.
같은 책, p.337.
같은 책, pp.334, 337.
같은 책, p.356.
230 논문
대한 답변은 생성의 정치학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남성(/인간)은 탁월하
게 다수적(majoritaire)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minoritaire)이며, 모든 생
성은 소수-생성이다.”37) 여기서 “다수”와 “소수”의 대립은 뿌리부터 정치
적 성격을 지닌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듯이, 다수와 소수는 양의 많고 적
음과는 관계가 없으며, 지배 권력의 소재에 의해 규정된다. 다수성은 “어떤
상태나 표준의 규정(la détermination d’un état ou d’un étalon)”을 가리키
며, “지배 상태”를 상정한다.38) 그리고 이 다수의 권리와 권력은 실제 수에
있어서는 많더라도 소수자 모두에게 행사된다. 가령 “도시에서의 다수성은
투표권을 전제하며, 그 수가 많건 적건 간에 투표권을 소유한 자들 사이에
서 설립될 뿐 아니라 투표권을 갖지 않은 자들에게 행사되는 것이기도 하
다. 그런 점에서 모든 생성이 소수적이라는 말은, 탁월하게 정치적인 의미
를 갖는다.”39) 나아가 다수성은 표준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신을 중심으
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등급을 매긴다.
사실 “~-생성”의 “~” 자리에 오는 것들은 ‘소수’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 아무 것이나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한다. “생성이나 과정(devenir ou
processus)으로서의 “소수(minoritaire)”와 집합이나 상태(ensemble ou
état)로서의 “소수성(minorit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40) 유대인, 집시,
흑인, 여성 등은 상태로서의 소수성 위에서는 여전히 “재영토화”될 위험을
안고 있으며, 따라서 각각 자신의 “생성”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령 “여성
들조차도 여성-생성을 해야만 한다. […] 여성도 여성-생성을 해야 한다. 하
지만 남성 전체의 여성-생성 속에서 그래야 한다.”41) 이처럼 “소수-생성”
은 “상태로서의 소수성”을 매개로 해서 현실에서 실제로 생성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모든 생성은 정치적 실천을 요청한다.
36)
37)
38)
39)
40)
41)
같은 곳.
같은 곳.
같은 곳.
같은 곳.
같은 곳.
같은 곳.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31
여기서 “아이” 그리고 특히 “소녀(la jeune fille)”가 생성의 탁월한 예로
등장한다. 소녀는 이중의 의미에서 소수자이다. 소녀는 아이인 동시에 여성
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남성, 여성, 아이, 어른 같은 대립하는 각 항들과 동시간적으로 머
물러 있는 생성의 블록과도 같다. 여성이 되는 것이 소녀가 아니라, 보편적
소녀를 만드는 것이 여성-생성이다. 아이가 되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보편
적 청춘(jeunesse)을 만드는 것이 아이-생성이다. […] 확실한 것은 분자적
정치학(la politique moléculaire)은 소녀와 아이를 지나간다는 점이다.
[…] 소녀와 아이가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나 아이가 생성 그 자체이
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에 못지않게 소녀가 여성이 되는 것
이 아니다. 소녀는 각 성의 여성-생성이며, 이는 아이가 각 나이의 청춘-생
성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이를 먹을 줄 안다는 것은 젊은 채로 머문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이에서 이 나이의 청춘을 구성하는 입자들, 빠름과 느
림, 흐름들을 추출한다는 것이다.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남자나 여자로 머
문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으로부터 이 성욕의 소녀를 구성하는 입자
들, 빠름과 느림, 흐름들, n개의 성을 추출한다는 것이다.”42)
그런데 소녀가 생성의 탁월한 예일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분자적 정치학”
을 가동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Ⅲ절에서 통계적 · 그램분자적 구성체 내지
상태와 요소적 · 분자적 과정 내지 운동이 구별된다는 점은 살펴 본 바 있
다. 그렇다면 더 구체적으로 “분자적 정치학”은 무엇을 뜻할까?
들뢰즈 & 과타리에게 분자적 요소들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우주의 근원
적 힘들을 포착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성의 의인적 재현”에 머물게 되
면 통계적 · 그램분자적 수준에서 성과 성욕을 착상함으로써 핵심을 놓치
게 된다. 성욕은 ‘아빠-엄마-나’에서 출발해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우주 생
성의 경과를 이끄는 에너지로 이해해야 한다. 빅뱅 이후 우주 진화의 역사
속에서 생물이 탄생하고 인간이 생겨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간적 성의
기초는 우주의 자기-생산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이 우주가 들뢰즈&과타리
의 “무의식”이며, 그 생성의 에너지가 “성욕”과 “욕망”이다.
42) 같은 책, pp.339-340.
232 논문
1)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des machines productrices ou
désirantes),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類的) 삶 전체로다. […] 과정으로서의
생산은 모든 관념적 범주를 넘어서 있으며, 내재적 원리로서의 욕망과 관계
된 하나의 순환을 형성한다.”43)
2)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le réel)를 생산한다. 욕망이 생산자
라면, 그것은 현실 속의, 그리고 현실의 생산자일 수 있을 따름이다. […] 현
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
다.”44)
이렇듯 우주 내지 무의식은 “자기-생산”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이
“현실계”요 그 에너지 또는 “내재적 원리”가 “욕망”이다. 여기서 또 하나
유의할 점은 들뢰즈 & 과타리에게 “욕망하기”는 “생산하기”와 동의어라는
점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욕망에 대한 이런 착상은 거부되어 왔다. 욕망은
결핍된 것을 소유하려는 활동이거나 기껏해야 환상이나 심리적 현실의 생
산이라고만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45) 하지만 “배치체(agencement)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욕망이란 없다. 욕망은 항상 구성주의였으며, 하나의 배치
체, 하나의 집합체(ensemble)를 구성한다.”46) 말하자면 욕망은 결핍된 것
을 찾아 나서 충족하기 위해 안(심리 세계)에서 밖(물리적 현실)으로 향하
게 될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밖으로부터, 재료들의 조립 과정에서의 무수
한 우연들을 거치면서 만남과 결합을 구성한다.47) 들뢰즈가 들고 있는 예
는 “술”이다. 우리가 ‘술이 마시고 싶다, 술을 욕망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알코올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알코올을 흡수하겠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그 말은 맛있는 술과 안주를 비롯해 좋은 친구, 분위기, 음악, 술집, 주인장
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집합체 또는 배치체를 구성하겠다는 뜻이다. 바로 이
런 의미에서 욕망의 구성주의가 성립한다. 욕망은 공장 기계의 작업인 조
43)
44)
45)
46)
Deleuze & Guattari, L’Anti-Oedipe, pp.8, 10-11.
같은 책, p.34.
같은 책, p.32-33.
Gilles Deleuze & Claire Parnet (1996), L'Abécédaire de Gilles Deleuze. 영상 인터뷰
중 “Désir” 항목.
47) Deleuze & Parnet, Dialogues, pp.66, 116.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233
립, 구성, 배치, 가공 따위의 활동으로서의 생산이다. 이는 ‘상황 속에서의
창조(creatio in situ)’ 또는 ‘이미 있는 것들의 재활용(recycle)’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이며 “욕망은 하부구
조에 속하지 이데올로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한다.48) 분자적 정
치학은 무의식과 욕망에 대한, 비-인간적 성과 n개의 성에 대한 이런 이해
의 층위에서 실행된다.
이 층위에서 생성은 생산 또는 욕망과 합류한다. Ⅱ절에서는 생성이 존
재론적, 윤리적인 두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생성은 이제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 말하자면, 기존의 표준 권력(다수성)을 파괴하면서 새로
운 배치체를 구성하는 욕망적 생산에 합류함으로써, 세계는 요동친다. 들뢰
즈 & 과타리는 이 점을 다음 구절에서 잘 말하고 있다.
“욕망이 억압되는 까닭은, 아무리 작은 욕망일지라도 일단 욕망이 있게 되
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사회적(a-social)
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다. 하지만 욕망은 뒤죽박죽이다. 욕망 기계가
있을 수 있게 되면 사회의 모든 부문은 온통 요동친다. […] 어떤 사회라도
참된 욕망의 정립을 허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착취, 예속, 위계의 구조가 반드
시 위태로워진다. 만일 어떤 사회가 이 구조들과 뒤섞이면(이것은 재미있
는 가정이다) 그때에는, 그렇다, 욕망이 그 사회를 본질적으로 위협한다.
[…] 욕망은 그것이 어머니와 동침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협하
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욕망이 성욕과는 다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욕과 사랑은 오이
디푸스의 침실에서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훨씬 넓은 곳을 꿈꾸고 기성 질
서 속에 저장되지 않는 낯선 흐름들을 흐르게 한다는 뜻이다. 욕망은 혁명
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그 자체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
람으로써 혁명적이다.”49)
이로써 “생성의 정치학”은 궁극적으로는 “비인간적 욕망의 정치학”임이
확인된다. 싸움의 대상은 착취와 예속과 위계로 가득 찬 기성 사회 질서이
다. 욕망은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 하며, 이를 통해 기성 사회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상태로 있지 못하게 된다.
48) Deleuze & Guattari, L’Anti-Oedipe, pp.124, 416.
49) 같은 책, p.138.
234 논문
Ⅴ. 맺는 말
나는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여성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서 첫째 물음을 ‘생성의 정치학’의 문제로 둘째 물음
을 ‘여성-생성’의 문제로 변환하면서 논의를 시작했다.
들뢰즈는 초기부터 여성과 성의 문제를 생성과 생산의 문제와 함께 고찰
했다. 특히 과타리와의 만남 이후 들뢰즈는 생성을 재생산(생식), 모방, 흉
내, 모델 따르기, 동화 등과 예리하게 구별한다. 생성이란 두 그램분자적 항
에서 분자적 요소들을 추출해서 하나의 블록을 이룸으로써 성립한다.
특히 “동물-생성”은 생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입구의 역할을 한다. 우리
에게 가장 익숙한 생성이 바로 동물-생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생성 일반”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거기서는 “여성”과 “남
성”이라는 통계적 · 그램분자적 항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러한 “성의 의
인적 재현”을 가로질러 “비-인간적 성”에, “n개의 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여성” 역시도 고정적인 집합이나 상태로 이해되어서
는 안 되며 생성이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여성은 “소
수”의 대표 자격을 지닐 수 있다. 지배적 표준으로서의 “다수성”을 대표하
는 “인간/남성”에 맞서서만 “동물”과 “여성”은 “소수자”이다. “여성조차도
여성-생성을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는 “분자적 정치학”을 가동케 하는데, 분자적 요소들에 이른다는 것은
“무의식”으로서의 우주와 그 내재적 원리로서의 “성욕”과 “욕망”에 이른
다는 뜻이다. 여기서 욕망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배치체를 구성한다는 일이
며, 그럼으로써 기존 사회 질서를 요동케 하고 변화시킨다. “생성의 정치
학”은 곧 “비인간적 욕망의 정치학”인 것이다.
투 고 일: 2015. 01. 30
심사완료일: 2015. 02. 16
게재확정일: 2015. 02. 17
김재인
서울대학교 강사
여성-생성, n개의 성 또는 생성의 정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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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ABSTRACT
Becoming-woman, n Sexes and the Politics of
Becoming in Deleuze and Guattari
Kim, Jae-Yin
I will consider the problems of “becoming-woman” and the “politics
of becoming.” In Deleuze, “becoming” means producing a bloc of
molecular elements which are captured from two or more molar terms.
We must consider “becoming in general,” where statistic and molar
terms like “woman” and “man” are not helpful to grasp its real
meaning. We should reach a “non-human sex” or “n sexes” beyond “the
anthropomorphic representation of sex.” Thus “woman” also should be
conceived not as a fixed state but as a process. “Animal” and “woman”
can remain minor compared to “man,” the “majority” or standard. It
should be that even woman have to become-woman. In this way, we
practice “molecular politics” so as to reach “molecular elements,” and
we should view the universe as “the unconscious” and “sexuality” and
“desire” as its immanent principle. Desire means the construction of a
desirable assemblage, while established social orders will be jolted and
changed. The “politics of becoming” is the “politics of nonhuman
desire.”
Keywords: feminism, becoming-woman, n sexes, politics of becoming,
des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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